오늘 무슨 일이 있었더라

잠자리에 들며 '오늘 뭐했지?' 생각해보면 '출근해서 일하다 퇴근하고 저녁 먹고 집안일 조금 하다 하루가 갔구나'라는 요약본을 만나게 된다.

하루에 수없이 많은 일이 벌어진다. 아침에 출근하러 집을 나서 길을 걷다가 불규칙한 보도블록에 발을 삐끗할 뻔하다 무사히 균형을 잡아내고, 내 눈으로 날아드는 꽃가루를 피해 걸으며, 휴대폰으로 넷플릭스를 보는데 강한 아침 햇살에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아 휴대폰을 들고 있는 각도를 이리저리 바꿔보지만 영 시원찮다. 아마 이렇게 적자면 한도 끝도 없이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잠자리에 들며 '오늘 뭐했지?' 생각해보면 '출근해서 일하다 퇴근하고 저녁 먹고 집안일 조금 하다 하루가 갔구나'라는 요약본을 만나게 된다.

추상화는 자연스럽다. 추상화를 거치지 않으면 처리할 데이터가 너무 많아 뇌가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추상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추상화의 레벨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오늘 일 했다'라고 추상화해버릴 수도 있지만 '오늘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잘 모르는 다른 팀 누구누구를 만나 같이 먹었는데 이러이러한 대화 내용이 재밌었고, 그 후에 일을 하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었는데 동료 누구가 친절하게도 도움을 줘서 잘 해냈고 나도 다음에 그를 도와주기로 결심했다'와 같이 비교적 상세하게 추상화할 수도 있다. 이는 내 선택에 달린 것이다. 전자에 비해 후자는 에너지 소모가 크다. 하지만 똑같은 경험을 했더라도 후자는 남는 게 많다. 깨닫는 점도 많고 일상을 풍성하게 즐길 수 있다. 그렇게 하려면 에너지를 그만큼 사용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풍성함에 의해 도리어 에너지가 충전되기도 한다.

바쁜 업무 가운데 빠져들며 아무 에너지 없이 일상을 두리뭉실하게 추상화해버리며 지내고 있는 나 자신에게,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적은 글이다.